영의 자리 - 고민실
Finished on January 14, 2024
View on Google Books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날, 나는 특정한 조건의 책을 찾고 있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동시대를 다룬 소설이면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너무 “연극적”이지 않은 것. 당시 읽던 책들은 대부분 답을 찾기 위한 실용서였기에, 새로 읽을 책은 독자가 자기 나름의 교훈을 만드는 책이었으면 했다. 또, 한국어의 말맛이 잘 느껴지면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읽고 싶었다. 가까스로 집어든 예쁜 표지의 책이 『영의 자리』였다.
책 중간중간, 서울살이를 한다면 마주했을 법한 풍경이나 기분을 생생하게 묘사한 부분들을 마주하고 감탄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천둥소리가 들렸다. 안쪽의 반투명한 유리창은 빡빡해서 열려면 위쪽과 아래쪽에 번갈아 힘을 주어야 했다. 바깥쪽의 투명한 유리창으로 길게 내리치는 빗줄기가 보였다. 입안을 데우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거세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노르스름하게 빛났다. 방범창 때문에 갈라진 불빛이 매트리스에 내려앉았다. 나는 조각난 불빛 위에 주저앉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떠 들어 가볍게 털어버리고 싶었다. 약국에 면접을 보러 갔다고 말해도 좋을 사람이 누구일까.
혹은 무심하게 스쳐 보냈지만 곱씹어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아름다운 언어로 문장에 담겨 있었다.
매료의 기억을 가진 사람에게서 발견하기 쉬운 열정의 부스러기가 조의 눈에서 반짝였다.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책을 덮은 직후에는 이야기가 좀 흐지부지 끝난 것 아닌가 싶었지만, 「0.8」에서 이미 주인공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겼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